한국과 호주의 현대미술은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90년대 양국에서 서로의 미술을 알리는 전시가 국립미술관에서 처음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호주 브리스번에서 열리는 대규모 국제전 아시아퍼시픽트리엔날레(Asia Pacific Triennale, APT)는 지는 8회의 에디션동안 한국미술의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국제전 중 하나가 되어 왔다. APT를 통해 본 '호주의 한국미술 열기'를 호주 아시아 아트 링크 설립자인 호주 필자 앨리슨캐롤이 전한다. 또한 올해 APT에 참여한 세명의 한국작가(최정화, 정은영, 양혜규)의 작업을 정연심이 소개한다. 이 원고는 출판을 통한 또다른 '한~호 미술교류'의 결과물, 호주 시각예술 잡지 아트링크(Artlink)와 더아트로가 공동으로 발행하는 '한국미술 특별호'(Vol35.4.2015Dec)의 기사이다. 호주와 한국, 두 나라의 미술의 교차하는 APT의 현장을 전한다.
지난 22년 동안 브리즈번에서 개최된 아시아퍼시픽트리엔날레(Asia Pacific Triennial of Contemporary Art, 이하 APT)에서 선보인 한국미술은 한국을 제외한 국제무대에서 한국미술을 가장 폭넓게 소개한 전시로 꼽을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이 당신을 놀랍게 했는가? 나는 사실 조금 놀랐다. 왜냐하면 APT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되새겨볼 수 있는 기회가 됐기 때문이다. APT는 순전한 후츠파(역자 주: 뻔뻔함, 담대함, 저돌성, 무례함을 뜻하는 말. 본래 히브리어로 이스라엘 특유의 도전정신을 일컬음)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놀랍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미술관의 경이로운 지원과, 국가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해를 거듭할수록 지칠 줄 모르는 지적인 에너지와 창의적인 생각의 산실이 되어 관객과 작가에게 긍정적인 지적 자극을 주었고, 이에 걸맞은 물리적 결과물을 선보이는 등 APT가 약속했던 것에 무게를 더해갔다. APT는 조금씩 변화를 거듭했지만, APT가 가진 기본 개념과 에너지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지난 8회 동안 APT에 참여했던 한국작가 목록을 살펴보면, 젊어서부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던 작가들을 비롯하여 현재 중요한 한국작가로 거론되는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30여 명의 한국작가가 소개되었고, 많은 장소 특정적 작품이 제작됐다. 또한 상업화랑에서 그 작품을 구입하여,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컨템포러리 아시아 미술 컬렉션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매번 모험을 즐기는 듯 보이는 작가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 중 일부의 작가들은 현재 쇠퇴한 듯 보이기도 한다. 내가 한국미술과 관련한 APT의 역할을 떠올리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이 정도로 높은 수준의 지속적인 전시를 다른 어느 나라에서 선보인 적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베니스비엔날레(Venezia Biennale)의 한국관이 가장 먼저 떠오를 수 있지만, 보통 한 작가만을 선정하여 작품을 전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베니스비엔날레의 한국관과 마찬가지로, APT 역시 각 작가의 작품이 가진 가치를 잘 보여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팻 호피(Pat Hoffie)는 “무엇이 ‘핫’한지”가 작품 선정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상업화랑에 의해 다양한 미학적, 지정학적 균형을 맞추게 되었고, 또한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기 위한 욕구 역시 무시할 수 없다고 언급한 바 있다. APT의 트렌드는 북한, 메콩, 뉴기니섬, 중동, 혹은 올해처럼 몽골 등 특정 지역이 떠오르고 또 후퇴하기를 반복하는 역사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진다. 남한의 경우는 꾸준히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고, 경미한 수준의 기복만이 있었을 뿐이다. 무엇이 ‘핫’한지와 같은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APT 주위를 둘러싼 환경에는 일정 부분 변화가 있었다. 1990년대에는 호주의 작가, 큐레이터가 한국의 동료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91년 APT는 갤러리 디렉터인 더그 홀(Doug Hall)과 함께 서울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에 방문해 첫 번째 담화를 나눴다. 아시아링크가 그 뒤를 이었다. 나는 1993년 외교통상부의 지원을 받아 미래에 실행 가능한 시각예술분야 교류 방식, 레지던시 개발, 전시기획을 위한 방문, 교류전시 등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1998년 빅토리아국립미술관과 NSW 주립미술관에서 열린 첫 컨템포러리 한국미술 관련 전시, 김선정이 기획한 “ 느림(Slowness of Speed)”전을 포함한다.) 진 셔먼(Gene Sherman), 한나 핑크(Hannah Fink) 등도 몇몇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한나는 미술잡지 아트아시아퍼시픽(ARTAsiaPacific)의 한국 특별판을 담당했다. 1996년 시드니에서 인쇄했으며, 노재령이 편집을 맡았다. 노재령은 2001년에 출판사 크래프츠맨하우스(Craftsman House)에서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에 관련된 책을 출간했다. 그는 한국 미술에 관한 영어 자료의 부재 때문에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이유로 국제적인 출판물, 혹은 컨퍼런스에서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가 주변적 위치에 물러 있는 것”(p. 7)을 지적했다. 이 책은 지난 천 년의 분수령이 되는 1990년대부터, 무수히 많은 씨실과 날실이 엮여 만들어진 2000년대까지의 한국 미술을 다룬다. 국제적인 연관관계 속에서 한국미술은 더욱 복잡다단한 특성을 갖추게 되는데, 아트링크의 이 출판물에서도 상세하게 기술됐다.
APT에 한국이 관여하게 된 기간은 국제적인 아트씬에 한국미술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시기이기도 하다. 1991년 임시적이고, 불확정적인 관계가 맺어졌고, 추후 10여 년 동안 한국미술의 다양한 층위가 국제무대에 소개됐다. 1990년대 한국과 호주의 관계는 상당히 예외적인 것이었고, 수많은 한국 작가, 큐레이터가 호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역으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같은 관계는 불행히도 향후 15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약화되었다.
1990년대에 한국미술이 국제미술계에서 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지만, 국가간의 경계가 유동적이고 점차 약화되고 있는 오늘날 보다는 설득력이 약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많은 프로젝트가 국가적으로 특수한 지반 위에서 소개되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언급할 만하다. 다른 덜 알려진 문화적인 표현수단에 비해서 한국미술은 이국적인 특성의 정수를 추출해내서 해외에 소개됐다. 넓은 의미에서 한국의 시각 문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거나, 혹은 유교 같은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사회적인 미묘한 맥락을 담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이 논의를 위해 두 개의 예시를 들려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최은주는 1991년 “APT”에 한국미술에 관해 조언을 한 첫 번째 큐레이터다. 그는 제1회 후쿠오카트리엔날레(Fukuoka Asian Art Triennale)(1999) 카탈로그에 싣기 위해 “다원주의 사회에서 컨템포러리 한국미술과 소통의 문제(Contemporary Korean Art in Pluralism and the Issue of ‘Communication’)”를 작성했다. 이 글에서 그는 리버풀 테이트갤러리에서 열린 “ 자연과 함께(Working with Nature)”(1992)전, 제1회 APT, 도쿄와 오사카에서 열린 “1990년대 한국미술(An Aspect of Korean Art in the 1990s)”(1996)전, 이 세 전시가 모두 “한국미술의 실체를 주의깊게 살피던” 해외 큐레이터에 의해 기획되었고, “세 전시는 공통적으로 한국미술의 명확한 성격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밝혔다. 쌈지스페이스의 설립자이자 현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인 김홍희는 2007년 상하이에서 이 주제에 관해 발표했고, 이후 출판물로 정리되어 나왔다. (책 이름은 “차이를 큐레이팅하기; 아시안 큐레이터로서의 열망과 딜레마(Curating Differences; Aspiration and Dilemma of an Asian Curator)”(비즈아트, 상하이)이다.) 그는 국제비엔날레의 공식적인 특성은 “국가적이고 지역적 특성을 반영해 분명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임을 강조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국적 오리엔탈리즘으로 귀결될 수 있는 심각한 위험성을 안고 있으며, “자기 스스로 주변화하는 것을 통해 반-오리엔탈리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그는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지금/여기”의 작품이지, “전통적인 한국성”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작가의 작품은 “외진(remote), 그리고 어려운”것으로 종종 잘못 이해되었으며,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국적인 시각과 오리엔탈리즘적이고 전통적인 모티프를 활용한 한국적 정체성을 찾고자 기대했다”고 전한다. 그는 비엔날레의 주제로서 ‘아시아’를 염려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뿌리로의 귀환”이 동양적 소재주의나 이국적 오리엔탈리즘으로 귀결되지 않기 위해 차이와 정체성을 양가성의 코드로 인식하는 시각이 요구된다. 그는 이를 큐레이터가 도전해야 할 과제로 제시했다.
APT는 1996년에 이르러 카탈로그와 설치에 있어서 국가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일에 대한 중요성이 현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관객은 한국 작품에서 한국적인 특성을 발견할 수 있기를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 APT에서 소개된 한국 작품을 돌이켜보면, 내 기억에 남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1993년 소개된 이불의 세퀸을 가득 붙인 물고기(전시 날짜가 점점 지나가면 갈수록 냉장고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1996년 윤석남의 뾰족한 다리로 비틀거리듯 서있던 감미로운 분홍 소파, 1999년 섬세한 실로 만들어진 한명옥의 작품, 비교가 불가능한 백남준, 이우환의 작품, 그리고 2002년 무수히 많은 플라스틱 노동자 인형들이 받쳐들고 있는 서도호의 다리(bridge), 2009년 폭발적으로 등장한 북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 2012년 김홍석의 검정색 쓰레기 봉투로 만든 거대한 강아지 조각 등. 이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만한 ‘한국성’이 있는가? ‘활력’이 동일하게 발견된다. 더그 홀은 “수줍음의 부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APT에 소개된 다른 모든 작품에서도 발견 가능한 것이다.
모든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이 작가가 살아 온 물리적 환경과 문화적 특수성을 일부 반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가? 그리고 그것을 꼭 찾아내서 인지하는 것이 중요한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렇기도 하다. 우리가 특정 작품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작품이 만들어진 환경에 관한 정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정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무엇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아트링크의 이 출판물을 통해 독자는 한국 미술이 무엇인지, 오늘날의 한국성에 관해 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웹사이트나 공공기관, 사조직에서 생산해 낸 무수히 많은 출판물이 존재한다. (광주에서도 곧 정부 주도의 대규모의 공공기관이 탄생할 예정이다) 또한 한국 출신의 작가들이 대거 포함된 국제단체도 많아, 각 작품에 관해 폭넓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국에서 각기 다른 문화가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지, 한국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려고 한다. 1995년 시작된 광주비엔날레는 거대한 사업이었다. 다섯 개의 카탈로그를 만들었고, 엄청난 크기의 새 건물을 지었으며, 그 건물 주변에는 백남준의 작품이 빛을 더했다. 제2회 APT 작가를 선정하기 위해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안소연, 크리스 세인즈(Chris Saines), 데이비드 윌리엄스(David Williams)와 내가 미팅을 했다. 우리는 모두 항상 얌전하고 쿨한 태도를 견지한 그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어리벙벙한 상태였다. 그는 “국가적 비상사태”라는 단어를 실제로 사용하며, 첫 번째 비엔날레를 날짜에 맞추어 성공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모두가 광주라는 작은 도시에 빨리 모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APT”는 단 한 번도 “국가적 비상사태”였던 적이 없다. 하지만 한국미술과의 관계, 다양한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성취를 생각한다면, 더 극적으로 인지되는 것이 그것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이 원고는 호주 아트링크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협력으로 발행되었으며, 아트링크의 ‘한국미술 특집호’(KOREA contemporary art now,V.35:1, Dec. 2015)에 먼저 출판되었다.
멜버른대학교에 위치한 “아시아링크아츠”의 설립자이며 2010년까지 공동 디렉터를 맡았다. 그는 제2회 APT의 한국 셀렉션의 협력큐레이터였다. 저서 The Revolutionary Century:Art in Asia1900-2000,(Macmillan 2010)의 저자로, 이우환, 최정화 인터뷰가 포함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아시아미술로의 여행(A Journey Through Asian Art)”을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