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 쓰기'는 당사자 간의 권리보호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지만, 아직 미술계에서는 많은 이들이 계약서를 어색하게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의 상황은 너무나 다양한 반면, 관련된 선례는 턱없이 부족하다. 더아트로는 그간 기획한 수많은 전시보다 더 많은 계약서를 작성해 온 필자의 경험담을 통해, 전시에 필요한 계약서 쓰기의 제반 사항을 전한다. 일반적인 '전시참여 계약서'와 '작품 대여 계약서'외에도, 커미션을 받아 신작을 만드는 경우, 혹은 매체와 소장 범위의 확장에 따라 계약서의 내용과 종류는 끝없이 복잡해진다. 하지만 필자는, 계약서 쓰기는 결국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일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 하나의 전시를 마치면서 그간 진행했던 업무파일을 정리하다보니 계약서만 500여 개가 넘는 걸 확인했다.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마치 변호사가 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는데, 문득 처음에 일을 시작하던 때 계약서 한 장 없이 작품을 주고받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상대적으로 많이 보편화되고는 있지만, 미술계 안에서 계약서를 주고받는 것은 아직도 익숙하고 편한 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 이유를 추적해보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좁디좁은 미술계 안에서 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전시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표준계약서 혹은 어떤 기준으로 삼을만한 계약서 양식이 부재하는 것이 그 원인일 수도 있다. 사실 법적 지식이 부족한 미술인들에게, 그리고 미술이라는 특수한 분야에서 벌어지는 특정한 선례가 부족한 법적 틀 안에서 계약서는 양쪽 모두에게 굉장히 어려운 수학 문제를 앞에 둔 것처럼 막막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일 수 있다.
계약서가 보편화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던지 간에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계약서를 쓰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계약서를 직접 한 줄 한 줄 써내려 가다보면 알 수 있겠지만, 계약서를 쓴다는 것은 곧 그 일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계약서를 쓰면서 지금 진행하는 일 안에서 기준을 세우고 구조를 만들고 미리 일어날 여러 상황들을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생각보다는 쉽지만, 일어나지 않은 상황 또한 감안해서 반영해야하기 때문에 복잡할 수 있다. 전시를 진행하면서 쓰는 계약서의 종류는 굉장히 다양하다. 하나의 전시에서 나올 수 있는 계약의 종류는 작품의 성격에 따라, 전시의 성격에 따라 매번 달라질 수 있다. 그렇지만 큰 맥락에서, 계약서의 종류를 일반적인 전시 진행에 따라, 그리고 신규 제작 및 커미션 작품 제작에 따라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작가가 전시에 참여하는 경우와 갤러리 또는 콜렉터에게 직접 작품을 대여하는 경우 ‘전시 참여 계약서’와 ‘작품 대여 계약서’를 작성한다. 이 경우 모두 기본적으로 계약의 목적, 전시 개요, 계약 유지 기간 또는 작품 대여 기간, 작품의 목록, 비용 부담, 운송 및 설치, 보험, 작품의 안전 관리 주체, 상태 점검 및 분쟁 해결을 위한 관할 법원 등이 명기되어야 한다. 전시 참여를 위한 계약서나 작품 대여를 위한 계약서는 가장 흔히 쓰이는 계약서이고 상황에 따라 생략하거나 기본적인 내용만 서로 공유하고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작품의 대여 조건과 비용 부담의 주체, 전문 운송사의 사용 여부, 미술품 보험의 적용 여부 및 계약 일자 등을 챙겨야 한다. 이외에도 부가적으로 도록 및 홍보의 목적으로 작품의 이미지를 사용할 경우, 계약서에 명시해야 하는 사항은 추가된다. 기본적으로 작품의 소유권, 저작권, 전시권 등은 분리되어 있다. 대부분 작품의 소유권에 대해서는 크게 어려워하지 않는데 저작권의 경우 조금 더 복잡해진다. 저작권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도 책이 한권 나올 만큼의 분량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사항만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대게 작품 이미지의 경우 작품 사진을 사용할 때 작가와 그 작품을 찍은 사진가에게 모두 저작권이 있지만, 때로 작가의 소속 갤러리에서 이러한 문제 등을 대신해서 해결하기도 하고, 협의 하에 소유권을 대리해서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기본적으로 저작권은 사후에도 적용이 되기 때문에 작고한 작가여도 유족 등에게 확인을 거쳐야 하는데, 외국의 경우 작가의 재단 등에서 체계적으로 관리를 하는 경우가 많아 확인이 필요하다. 상황에 따라서 이미지에 대한 사용료를 지불해야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전시가 열리고 그에 관한 기록물을 제작하기 위한 것이라면 사전에 작가와 해당 기관에 미리 협의하고 관련한 원칙을 계약서에 명기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상당부분 해결되기 때문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작가에게 직접, 혹은 해당 기관으로부터 작품을 대여해오는 것이 아닌, 개인 소장자에게서 작품을 가져올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해외 도록에서는 종종 개인 소장가가 명기되어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국내에서는 흔치는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도 점점 경매 등이 활성화 되고 있고 앞으로 보다 투명하고 발전적인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라도 그 출처를 밝히는 것은 필요하다. 개인 정보가 들어가는 것을 꺼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사전에 소장처의 표시 유무 등을 확인하고 그 부분을 계약서에 명시해두는 것이 좋다.
작품을 새로 제작하거나 커미션 형태로 제작할 경우 계약서에 들어가야 하는 내용은 늘어나고 복잡해진다. 그리고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분쟁에 대비하기 위해 여러 상황들을 예측해보고 계약서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작에 따르는 작품을 계약할 때 가장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할 사항은 이 작품이 제작되는 목적과 사후 활용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제작비의 부담 주체, 전시 이후 작품 소장 여부, 만약 파기하지 않는다면 그 소장처는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계약서에 명시하는 내용이 달라진다. 그리고 전시의 성격 또한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전시가 비영리적인 성격인지, 아니면 어떤 영리적인 목적을 띠고 상업적인 이벤트와 함께 진행되는 것인지에 따라 제작비 산정 및 작가가 참여하는 조건이 달라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커미션 작품 등의 경우 상업적 목적에 따라 활용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에 이 경우 추가적인 비용 및 활용 범위에 따른 요구 조건 등이 상이해질 수 있다.
위와 같은 기본적인 고려사항 외에도 옵션은 무한대로 많아질 수 있다. 작가를 후원하는 개념에서 신규제작에 따르는 비용의 일정 금액을 지원해주고 전시를 진행하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훨씬 단순해지지만 커미션의 경우는 다르다. 처음 커미션 작품 진행에 따른 계약서 초안을 작성하면서 국내에는 많은 예도 없지만 있다하더라도 계약서 내용을 공개하지는 않기 때문에 외국의 예술법 관련서와 계약서 샘플집을 많이 참고 했다. 커미션 제작에 있어 핵심은 작품의 소유권 외에도 추후 발생할 수 있는 저작권 문제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또한 작품 제작 진행 과정에서 클라이언트의 확인이 몇 회 이상,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혹여 최종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구입이나 전시 등을 보류할 경우, 어느 정도 선에서 지불과 계약의 이행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까지 명시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계약서를 쓸 시점에는 이런 부분까지 시시콜콜하게 적어야 하나 싶을 때도 있지만 사소한 부분을 명시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는 생각보다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소송이나 분쟁까지 이르는 커다란 문제는 아니더라도, 명확한 기준과 일정을 세우고 일을 진행했을 때 서로의 책임 범위와 역할이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에 계약서 작성이 사소한 마찰 등을 최소화시킬 수 있다.
이밖에도 제작과 관련해서 계약서 작성 단계에서부터 작품의 장르에 따른 차이점을 고려해서 반영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회화 작품과 사진의 성격이 다르고, 미디어 작품의 경우 고려해야 할 사항 등이 훨씬 복잡해지기 때문에 하나의 전시에서도 작품의 성격에 맞는 각각의 다른 내용의 계약이 들어가야 한다. 예를 들어 회화 작품은 완성된 하나의 결과물만 나오지만 사진이나 판화 작품의 경우 결과물이 복수일 수 있다. 커미션 제작으로 작품이 제작되었다고 한다면 이 복수의 작품에 대한 소유권은 어디에 귀속되는 것일까? 그리고 에디션의 개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작품의 가치는 올라간다. 그렇다면 이때 어떤 기준으로 계약을 작성해야 할까? 복수 작품의 소유권은 작가에게 있을까, 아니면 작품 제작을 의뢰한 기관에 있을까? 미디어 작품의 경우, 그 작품의 귀속 범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장비와 작품의 구분은 어디까지일까? 유지 보수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위의 질문들에 대한 이상적인 정답은 없다. 사회적인 통념과 관행은 있을 수 있지만 어떤 작품이냐에 따라, 어떤 성격의 전시냐에 따라, 이후 작품의 소장이 작가에게 있는지 작품을 의뢰한 기관에게 있는지에 따라 내용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다만, 큐레이터는 그 안에서 분쟁이 발생될 수 있는 지점에 대해 최대한 예측하고 최소한의 기준과 나름의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작가 다음으로 그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전시의 큐레이터이고, 기관과 기업 사이에서 그 작가와 작품의 언어를 통역해줄 수 있는 사람이 큐레이터이기 때문이다.
“말이란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라는 속담이 있다. 같은 내용이라도 표현에 따라서 아주 다르게 들린다는 뜻인데, 계약서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계약서를 쓰는 과정은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분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서로 약속된 부분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전시가 놓이는 상황이 다르고, 작품의 이야기가 다르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매번 같을 수 없다. 계약서를 쓰고 고치고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의 역할 부분에 대한 내용을 재확인할 수 있고 서로를 존중하고 있다는 의사의 표시가 이루어진다. 큐레이터는 법률 전문가가 아니다. 그리고 모든 계약서를 법률가가 쓰지도 않는다. 수십 통의 반복되는 계약서를 쓰고 나서, 수십 종의 상이한 계약서를 다루면서, 그리고 각 계약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법률전문가들에게 피드백을 받으면서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면 계약서는 궁극적으로 감정을 다루는 일이라는 점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 모든 일과 같이 계약서의 가장 기본이다.
이화여대에서 섬유예술학과 의류직물학을 전공, 미술사를 부전공하고, 홍익대 대학원 예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10년 [아트인컬처]에서 주최하는 ‘New Vision 미술평론상’ 공모에 파이널리스트로 선정, 그 이후 다양한 매체에 미술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공공기관과 기업으로부터 지원 및 의뢰를 받아 국내외에서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기획 및 공동기획 전시로 아르코미술관 기획 공모전 당선작 “2의 공화국”(2013), 동경 국제 도서전 주빈국관 기념 전시 “필담창화 일만리”(2013), “백 만개의 층을 가진 정원”(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기념 전시 “두 개의 수도, 하나의 마음”(2014), “피스마이너스원”(2015) 등이 있다.